루이나–청평 구축함 충돌 사고 Ruina–Tiang Pheng Destroyer Collision Inciden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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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 시기 | 2014년 8월 14일 23시 41분 | |
발생 장소 | 랜드해협 동쪽 입구 남방 약 140해리 공해상 | |
사건 유형 | 군사적 충돌 / 해상 사고 / 외교 분쟁 / 은폐 | |
관여 함정 | 루이나 해군 구축함 RNS Valiant (DDG-73) 치앙펭인민군 해군 구축함 하이동(海東, Hải Đông, 171) | |
피해 규모 | 루이나 해군 8명 사망, 21명 부상 청평 해군 12명 사망, 17명 부상 | |
사건 경과 | 충돌 상황 | 차단 기동 중 청평 함정 뱃머리에 우현 함교부를 들이받힘. 루이나는 청평의 고의 충돌이라 발표. |
구조 활동 | 상호 불신으로 구조가 59분 지체됨. | |
외교적 파장 | 국교 없는 양국이 스위스를 거쳐 상호 비난. | |
후속 조치 | 해군 조사로 청평 책임 결론, 2019년 재조사에서 번복. | |
진상 규명 | 《코망테르》 탐사 보도 (2016~2019) | |
우현 전타. 나는 명령을 복창했고 키를 돌렸다. 그다음은 모두가 아는 대로다. 그리고 모두가 모르는 대로이기도 하다.클라라 V. 미로 전 RNS Valiant 조타병, 2018년 1월 《코망테르》 인터뷰에서
뒤에서 따라온 배는 옆구리를 저렇게 직각으로 찌를 수 없습니다. 우리 배가 그 배 앞을 가로지르고 있었던 겁니다.순직 수병 레오 J. 오드랑의 아버지 쥐스탱 M. 오드랑, 2015년 10월 《코망테르》에 보낸 편지에서
1. 개요 [편집]
2014년 8월 14일 밤 랜드해협 동쪽 입구 남방 공해상에서 청평(치앙펭인민공화국) 해군 구축함 하이동(海東)의 뱃머리가 루이나 해군 구축함 RNS Valiant의 우현 함교부를 들이받은 사고. 루이나 해군 8명, 청평 해군 12명이 숨졌다.
루이나 해군은 사고 직후 청평 구축함이 고의로 Valiant를 들이받았다고 발표했고, 리처드 콜턴 정부는 이를 청평의 도발로 규정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Valiant가 함대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청평 구축함의 진로 앞으로 반복해 끼어드는 차단 기동을 벌이다 150야드 거리에서 하이동의 뱃머리 앞을 가로지른 것이었다. 들이받힌 쪽은 Valiant였지만, 충돌을 만든 쪽도 Valiant였다. 해군은 항해일지를 고쳐 쓰고 전투정보실 기록을 회수했으며, 해군 사고조사위원회는 청평에 책임이 있다고 결론 내렸다. 대통령실은 늦어도 2014년 9월 초 기록 사이의 불일치를 보고받았으나 추가 조사를 지시하지 않았다.
진상은 시사주간지 《코망테르》가 2016년부터 2019년까지 4년에 걸쳐 이어 간 탐사 보도로 드러났다. 수리 전 Valiant의 우현 사진, 인근을 지나던 민간 컨테이너선의 레이더 기록, 전역한 징집병 승조원들의 증언, 고쳐 쓰기 전 항해일지의 사진이 차례로 공개되었다. 2019년 6월 국방부 재조사단은 해군의 발표를 공식 번복했고, 제2함대사령관과 함장 등 5명이 기소되었다.
루이나와 청평은 1977년 청북전쟁 정전 이후 지금까지 국교가 없다. 두 나라는 사고 당시에도 스위스를 거쳐 항의 서한을 주고받았을 뿐 공동조사에 합의하지 못했고, 청평이 요구한 국제 조사단은 루이나의 거부로 끝내 꾸려지지 않았다. 루이나 정부는 2019년 청평에 유감을 표명했으나, 청평은 이를 사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루이나 국내에서 이 사고는 해군에 대한 문민 통제, 그리고 징집병 승조원이 자신이 겪은 일을 말할 권리를 둘러싼 논쟁으로 이어졌다.
루이나 해군은 사고 직후 청평 구축함이 고의로 Valiant를 들이받았다고 발표했고, 리처드 콜턴 정부는 이를 청평의 도발로 규정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Valiant가 함대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청평 구축함의 진로 앞으로 반복해 끼어드는 차단 기동을 벌이다 150야드 거리에서 하이동의 뱃머리 앞을 가로지른 것이었다. 들이받힌 쪽은 Valiant였지만, 충돌을 만든 쪽도 Valiant였다. 해군은 항해일지를 고쳐 쓰고 전투정보실 기록을 회수했으며, 해군 사고조사위원회는 청평에 책임이 있다고 결론 내렸다. 대통령실은 늦어도 2014년 9월 초 기록 사이의 불일치를 보고받았으나 추가 조사를 지시하지 않았다.
진상은 시사주간지 《코망테르》가 2016년부터 2019년까지 4년에 걸쳐 이어 간 탐사 보도로 드러났다. 수리 전 Valiant의 우현 사진, 인근을 지나던 민간 컨테이너선의 레이더 기록, 전역한 징집병 승조원들의 증언, 고쳐 쓰기 전 항해일지의 사진이 차례로 공개되었다. 2019년 6월 국방부 재조사단은 해군의 발표를 공식 번복했고, 제2함대사령관과 함장 등 5명이 기소되었다.
루이나와 청평은 1977년 청북전쟁 정전 이후 지금까지 국교가 없다. 두 나라는 사고 당시에도 스위스를 거쳐 항의 서한을 주고받았을 뿐 공동조사에 합의하지 못했고, 청평이 요구한 국제 조사단은 루이나의 거부로 끝내 꾸려지지 않았다. 루이나 정부는 2019년 청평에 유감을 표명했으나, 청평은 이를 사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루이나 국내에서 이 사고는 해군에 대한 문민 통제, 그리고 징집병 승조원이 자신이 겪은 일을 말할 권리를 둘러싼 논쟁으로 이어졌다.
2. 명칭 [편집]
루이나 정부의 공식 명칭은 「RNS Valiant 충돌 사고」다. 2019년 재조사 이전까지 루이나 언론은 「8·14 청평 도발」이나 「Valiant 사건」이라는 표현을 주로 썼다. 청평 정부와 관영 매체는 처음부터 「하이동호 충돌 참사」 또는 「8·14 해상 참사」라고 불렀다.
2019년 이후 루이나에서는 사건의 핵심이 충돌보다 은폐에 있다는 이유로 「Valiant 은폐 사건」이라는 이름이 널리 쓰인다. 이 문서는 두 나라의 이름을 함께 쓴 중립적 명칭을 따른다.
2019년 이후 루이나에서는 사건의 핵심이 충돌보다 은폐에 있다는 이유로 「Valiant 은폐 사건」이라는 이름이 널리 쓰인다. 이 문서는 두 나라의 이름을 함께 쓴 중립적 명칭을 따른다.
3. 배경 [편집]
3.1. 정전 체제와 국교 부재 [편집]
1977년 7월 27일 바젤에서 체결된 청북전쟁 정전협정은 루이나·북산·청평 사이의 교전을 멈추었지만 평화조약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루이나와 청평은 그 뒤로 국교를 맺지 않았고, 두 나라 사이의 공식 연락은 정전협정에 따라 설치된 바젤 정전감시 공동위원회와 양측의 이익대표국인 스위스를 거쳐서만 이루어졌다.
정전협정의 해상 조항은 청북 해협과 양국 연안의 통제선만 다루었다. 협정이 체결된 1977년에 청평 해군은 연안 해군에 불과했고, 청평 군함이 원양에서 루이나 해군과 마주칠 가능성은 고려되지 않았다. 그 결과 두 나라 해군 사이에는 원양에서 조우할 때 따를 규칙도, 직접 연락할 수단도 없었다. 이 공백은 2000년대 들어 청평 해군이 원양으로 나오면서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정전협정의 해상 조항은 청북 해협과 양국 연안의 통제선만 다루었다. 협정이 체결된 1977년에 청평 해군은 연안 해군에 불과했고, 청평 군함이 원양에서 루이나 해군과 마주칠 가능성은 고려되지 않았다. 그 결과 두 나라 해군 사이에는 원양에서 조우할 때 따를 규칙도, 직접 연락할 수단도 없었다. 이 공백은 2000년대 들어 청평 해군이 원양으로 나오면서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3.2. 청평 해군의 원양 진출 [편집]
청평은 1978년 경제 개혁 노선을 채택하고 1980년대 산업화를 거치면서 해군 현대화에 나섰다. 2000년대 들어 대형 수상함 건조가 본격화되었고, 2011년 청평 최초의 원양형 구축함인 하이동급 1번함 하이동이 취역했다. 만재 배수량 6,300톤, 승조원 248명 규모로, 청평 관영 매체는 이 함정을 "바다로 나간 인민"이라고 불렀다.
2014년 7월 청평 국방부는 하이동이 「원양 항해 훈련 14-1」에 나서 랜드해협을 통과한다고 발표했다. 청평 군함의 랜드해협 통과는 정전 이후 처음이었다. 청평은 공해 항행의 자유를 들어 통상적인 훈련이라고 설명했지만, 루이나 해군은 이를 정전 체제 이후 가장 중대한 해상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2014년 7월 청평 국방부는 하이동이 「원양 항해 훈련 14-1」에 나서 랜드해협을 통과한다고 발표했다. 청평 군함의 랜드해협 통과는 정전 이후 처음이었다. 청평은 공해 항행의 자유를 들어 통상적인 훈련이라고 설명했지만, 루이나 해군은 이를 정전 체제 이후 가장 중대한 해상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3.3. 루이나 해군의 근접 감시 지침 [편집]
루이나 해군은 군 내에서 가장 큰 발언권을 가진 군종이다. 해군은 2012년 내부 지침인 「적성국 수상함 근접 감시 지침」을 개정해, 적성국 함정이 루이나 해군 훈련 구역 50해리 안으로 들어오면 현장 지휘관이 「진로 통제」를 할 수 있도록 했다. 지침은 진로 통제의 방법을 정하지 않았다. 2019년 재조사단은 해군 내부에서 진로 통제가 상대 함정의 진로 앞으로 반복해 끼어들어 방향을 바꾸게 만드는 차단 기동, 속칭 「어깨 밀기」를 뜻하는 말로 쓰였다고 밝혔다.
2012년부터 2014년 7월까지 루이나 해군이 적성국 함정을 상대로 진로 통제를 한 사례는 6건이었다. 이 가운데 두 번은 두 함정의 거리가 100야드 안으로 좁혀졌으나 충돌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6건은 모두 해군 내부 보고로만 처리되었고, 국방부 장관에게 보고된 것은 1건뿐이었다.
2012년부터 2014년 7월까지 루이나 해군이 적성국 함정을 상대로 진로 통제를 한 사례는 6건이었다. 이 가운데 두 번은 두 함정의 거리가 100야드 안으로 좁혀졌으나 충돌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6건은 모두 해군 내부 보고로만 처리되었고, 국방부 장관에게 보고된 것은 1건뿐이었다.
3.4. 콜턴 정부의 안보 정치 [편집]
2013년 9월 출범한 콜턴 정부는 2012년 대선 과정에서 불거진 국가정보국 여론조작 사건 때문에 출범부터 정당성 논란을 안고 있었다. 콜턴 정부는 안보를 국정의 중심에 두고 해군 예산을 늘렸다. 2014년 여름 콜턴의 국정 지지율은 30%대 후반에 머물러 있었다.
3.5. 관여 함정 [편집]
구분 | RNS Valiant | 하이동 |
소속 | 루이나 해군 제2함대 | 치앙펭인민군 해군 |
함급 | 인트레피드급 3번함 | 하이동급 1번함 |
취역 | 2006년 | 2011년 |
만재 배수량 | 9,200톤 | 6,300톤 |
승조원 | 312명 | 248명 |
함장 | 데릭 A. 폴 중령 | 레 꽝 끄엉(黎光強) 상교 |
Valiant 승조원 312명 가운데 188명은 징집병이었다. 남녀 모두를 징집하는 루이나에서 수상함 승조원의 절반 이상이 징집병인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하이동은 청평 해군이 보유한 가장 큰 수상함이었고, 승조원 대부분은 직업 군인이었다.
4. 경과 [편집]
4.1. 조우 (8월 12~14일) [편집]
루이나 해군 제2함대는 8월 11일부터 랜드해협 동쪽 입구 남방 해역에서 대잠 훈련 「SEAWALL 14」를 벌이고 있었다. 해군은 항행경보를 통해 가로 90해리, 세로 60해리의 훈련 구역을 선포했는데, 하이동의 예정 항로는 이 구역의 남쪽 경계에서 30해리 안쪽을 지나게 되어 있었다.
8월 12일 화요일 초계기가 하이동을 처음 포착했고, 제2함대는 제21구축전대 소속 Valiant에 근접 감시 임무를 맡겼다. 같은 전대의 호위함 RNS Ardent(FFG-54)가 Valiant와 동행했다.
8월 13일 하루 동안 Valiant는 하이동의 2~3해리 뒤에서 따라붙었다. 8월 14일 목요일 20시 30분, 하이동이 랜드해협 진입 항로로 북상하면서 훈련 구역 50해리 안으로 들어왔고, 지침상 진로 통제의 요건이 충족되었다. 22시 05분 전대장이 함대사령부에 상황을 보고했다.
23시 12분, 제2함대사령관 해럴드 P. 윈슬로 중장이 전술 위성통신으로 직접 지시를 내렸다. "적 함정의 진로를 통제하라. 훈련 구역 접근을 허용하지 말 것." 이 지시는 뒤에 함대사령부의 통신 기록에서 지워졌으나, Ardent의 통신 수신 기록에 남아 있다가 2019년 재조사에서 확인되었다.
8월 12일 화요일 초계기가 하이동을 처음 포착했고, 제2함대는 제21구축전대 소속 Valiant에 근접 감시 임무를 맡겼다. 같은 전대의 호위함 RNS Ardent(FFG-54)가 Valiant와 동행했다.
8월 13일 하루 동안 Valiant는 하이동의 2~3해리 뒤에서 따라붙었다. 8월 14일 목요일 20시 30분, 하이동이 랜드해협 진입 항로로 북상하면서 훈련 구역 50해리 안으로 들어왔고, 지침상 진로 통제의 요건이 충족되었다. 22시 05분 전대장이 함대사령부에 상황을 보고했다.
23시 12분, 제2함대사령관 해럴드 P. 윈슬로 중장이 전술 위성통신으로 직접 지시를 내렸다. "적 함정의 진로를 통제하라. 훈련 구역 접근을 허용하지 말 것." 이 지시는 뒤에 함대사령부의 통신 기록에서 지워졌으나, Ardent의 통신 수신 기록에 남아 있다가 2019년 재조사에서 확인되었다.
4.2. 충돌 (8월 14일 23시 41분) [편집]
23시 12분부터 23시 39분까지 Valiant는 하이동의 진로 앞으로 네 차례 끼어들었다. 끼어들 때마다 두 함정 사이의 거리는 1,000야드, 600야드, 350야드, 150야드로 좁혀졌다. 달이 없는 밤이었고, 파고는 1.5미터, 시정은 6해리였다. 두 함정 모두 항해등을 켜고 있었다.
하이동은 발광 신호와 국제 조난·호출 채널인 VHF 16번 채널로 영어 경고를 보냈다. "귀함은 위험한 항해를 하고 있다. 거리를 유지하라." Valiant는 "귀함은 루이나 해군 훈련 구역에 접근하고 있다. 좌현으로 변침하라"고 응답했다. 하이동은 변침하지 않고 공해상의 예정 항로를 유지했다.
23시 39분, 하이동의 좌현 후방에서 24노트로 추월하던 Valiant의 당직사관이 우현 전타를 명령했다. 다섯 번째로 하이동의 뱃머리 앞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로지르려는 기동이었다. 그러나 두 함정 사이의 거리는 이미 150야드에 불과했다. 하이동은 전속 후진을 걸고 좌현으로 방향을 틀어 Valiant의 뒤로 빠지려 했지만, 16노트이던 속력은 9노트 가까이로밖에 줄지 않았다. 23시 41분, 하이동의 뱃머리가 약 75도, 거의 직각에 가까운 각도로 Valiant의 우현 함교 아래를 들이받았다.
하이동의 뱃머리는 Valiant의 우현 함교 바로 아래 선체를 가로 약 5미터, 세로 4미터에 걸쳐 찢고 들어갔다. 흘수선 위로는 함장실과 통신실이 부서졌고, 흘수선 아래로 뚫린 구멍으로 바닷물이 제2 승조원 거주구역에 쏟아져 들어왔다. 비번으로 잠들어 있던 승조원 가운데 7명이 1분 남짓 만에 물이 찬 거주구역을 빠져나오지 못했고, 통신실에서 근무하던 1명이 숨졌다. 함장 폴은 함교에서 기동을 지휘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어 있던 함장실만 완전히 부서졌다. 통신실이 부서지면서 Valiant는 40분 동안 외부와 교신하지 못했고, 배는 우현으로 7도 기울었다.
하이동은 뱃머리가 7미터가량 찌그러지면서 앞쪽 승조원 거주구역이 짓눌리고 물에 잠겨 9명이 숨졌다. 하이동은 세 시간 가까운 위협 기동 동안 경계 배치를 유지하고 있어 앞갑판에 견시병과 신호병, 손상통제 요원들이 나와 있었는데, 충돌의 충격으로 이들 가운데 14명이 바다에 떨어지거나 뛰어내렸다.
하이동은 발광 신호와 국제 조난·호출 채널인 VHF 16번 채널로 영어 경고를 보냈다. "귀함은 위험한 항해를 하고 있다. 거리를 유지하라." Valiant는 "귀함은 루이나 해군 훈련 구역에 접근하고 있다. 좌현으로 변침하라"고 응답했다. 하이동은 변침하지 않고 공해상의 예정 항로를 유지했다.
23시 39분, 하이동의 좌현 후방에서 24노트로 추월하던 Valiant의 당직사관이 우현 전타를 명령했다. 다섯 번째로 하이동의 뱃머리 앞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로지르려는 기동이었다. 그러나 두 함정 사이의 거리는 이미 150야드에 불과했다. 하이동은 전속 후진을 걸고 좌현으로 방향을 틀어 Valiant의 뒤로 빠지려 했지만, 16노트이던 속력은 9노트 가까이로밖에 줄지 않았다. 23시 41분, 하이동의 뱃머리가 약 75도, 거의 직각에 가까운 각도로 Valiant의 우현 함교 아래를 들이받았다.
하이동의 뱃머리는 Valiant의 우현 함교 바로 아래 선체를 가로 약 5미터, 세로 4미터에 걸쳐 찢고 들어갔다. 흘수선 위로는 함장실과 통신실이 부서졌고, 흘수선 아래로 뚫린 구멍으로 바닷물이 제2 승조원 거주구역에 쏟아져 들어왔다. 비번으로 잠들어 있던 승조원 가운데 7명이 1분 남짓 만에 물이 찬 거주구역을 빠져나오지 못했고, 통신실에서 근무하던 1명이 숨졌다. 함장 폴은 함교에서 기동을 지휘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어 있던 함장실만 완전히 부서졌다. 통신실이 부서지면서 Valiant는 40분 동안 외부와 교신하지 못했고, 배는 우현으로 7도 기울었다.
하이동은 뱃머리가 7미터가량 찌그러지면서 앞쪽 승조원 거주구역이 짓눌리고 물에 잠겨 9명이 숨졌다. 하이동은 세 시간 가까운 위협 기동 동안 경계 배치를 유지하고 있어 앞갑판에 견시병과 신호병, 손상통제 요원들이 나와 있었는데, 충돌의 충격으로 이들 가운데 14명이 바다에 떨어지거나 뛰어내렸다.
4.3. 구조 [편집]
23시 44분 하이동은 국제 조난 채널로 구조를 요청했다. 2해리 떨어져 있던 Ardent는 23시 47분 함대사령부에 구조정을 내려도 되는지 물었으나, 함대사령부는 "적 함정 접근 금지, 대기"를 지시했다. 하이동이 무장한 상태이고 구조를 빌미로 한 충돌이나 승선이 벌어질 수 있다는 이유였다. 23시 52분에는 하이동도 발광 신호로 "접근하지 말라"고 알렸다. 기밀 장비가 있는 함정에 루이나 인원이 올라오는 것을 우려한 것으로 보인다.
함대사령부의 허가는 충돌 59분 뒤인 00시 40분에야 떨어졌다. Ardent의 구조정은 00시 52분 바다에 내려졌고, 01시 10분부터 02시 30분까지 청평 승조원 9명을 구조했다. 하이동은 자체 구조정으로 2명을 건졌다. 나머지 3명은 날이 밝은 뒤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재조사단의 의학 자문위원들은 구조가 지체되지 않았다면 이 가운데 일부는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하이동은 03시 무렵 앞쪽 격벽에서 침수를 막았고, 뱃머리가 3미터가량 가라앉은 채 6노트로 귀항길에 올랐다. 8월 16일 청평 해군 예인선과 호위함이 도착했고, 하이동은 8월 21일 청평의 쑤옹안 항으로 예인되었다. Valiant는 우현으로 기운 채 8노트로 항해해 8월 19일 오보레 해군기지에 입항했다.
함대사령부의 허가는 충돌 59분 뒤인 00시 40분에야 떨어졌다. Ardent의 구조정은 00시 52분 바다에 내려졌고, 01시 10분부터 02시 30분까지 청평 승조원 9명을 구조했다. 하이동은 자체 구조정으로 2명을 건졌다. 나머지 3명은 날이 밝은 뒤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재조사단의 의학 자문위원들은 구조가 지체되지 않았다면 이 가운데 일부는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하이동은 03시 무렵 앞쪽 격벽에서 침수를 막았고, 뱃머리가 3미터가량 가라앉은 채 6노트로 귀항길에 올랐다. 8월 16일 청평 해군 예인선과 호위함이 도착했고, 하이동은 8월 21일 청평의 쑤옹안 항으로 예인되었다. Valiant는 우현으로 기운 채 8노트로 항해해 8월 19일 오보레 해군기지에 입항했다.
4.4. 첫 발표 [편집]
8월 15일 금요일 06시, 루이나 해군은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같은 날 11시 청평 국방부는 정반대의 설명을 내놓았다.
8월 16일 토요일 콜턴은 TV 연설에서 "우리의 아들딸 여덟 명이 청평의 무모한 도발로 목숨을 잃었다. 그 가운데 여섯은 나라의 부름을 받고 바다로 나간 징집병이었다"고 말했다. 남녀 모두를 징집하는 루이나에서 이 연설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8월 19일 Valiant가 오보레 해군기지에 입항하자 해군은 찢겨 나간 우현 함교부의 사진을 공개했다. 옆구리를 들이받힌 함정의 모습은 청평 구축함이 들이받았다는 해군 발표를 누구에게나 납득시키는 증거처럼 보였고, 이 사진은 이후 사고를 상징하는 이미지가 되었다. 같은 사진이 해군 발표를 무너뜨리는 첫 단서가 되기까지는 1년 반이 걸렸다.
루이나 해군 발표 (2014년 8월 15일 06시, 발췌)
청평 구축함이 Valiant의 우현 후방에서 고속으로 접근하더니 갑자기 방향을 틀어 Valiant의 우현 함교부를 들이받았다. Valiant는 충돌을 피하기 위해 좌현으로 변침하며 속력을 높였으나, 청평 구축함이 끝까지 따라붙어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이는 명백한 고의 충돌이며, 해군은 이를 청평의 무모한 도발로 판단한다.
청평 구축함이 Valiant의 우현 후방에서 고속으로 접근하더니 갑자기 방향을 틀어 Valiant의 우현 함교부를 들이받았다. Valiant는 충돌을 피하기 위해 좌현으로 변침하며 속력을 높였으나, 청평 구축함이 끝까지 따라붙어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이는 명백한 고의 충돌이며, 해군은 이를 청평의 무모한 도발로 판단한다.
같은 날 11시 청평 국방부는 정반대의 설명을 내놓았다.
청평 국방부 발표 (2014년 8월 15일 11시, 발췌)
공해를 정상 항행하던 하이동에 루이나 구축함이 세 시간 가까이 위협 항해를 반복했다. 루이나 구축함은 여러 차례 하이동의 진로 앞으로 끼어들었고, 마침내 불과 150야드 앞에서 하이동의 뱃머리를 가로질렀다. 하이동은 전속 후진했으나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루이나는 구조를 가로막아 바다에 떨어진 우리 병사들을 죽게 했다.
공해를 정상 항행하던 하이동에 루이나 구축함이 세 시간 가까이 위협 항해를 반복했다. 루이나 구축함은 여러 차례 하이동의 진로 앞으로 끼어들었고, 마침내 불과 150야드 앞에서 하이동의 뱃머리를 가로질렀다. 하이동은 전속 후진했으나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루이나는 구조를 가로막아 바다에 떨어진 우리 병사들을 죽게 했다.
8월 16일 토요일 콜턴은 TV 연설에서 "우리의 아들딸 여덟 명이 청평의 무모한 도발로 목숨을 잃었다. 그 가운데 여섯은 나라의 부름을 받고 바다로 나간 징집병이었다"고 말했다. 남녀 모두를 징집하는 루이나에서 이 연설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8월 19일 Valiant가 오보레 해군기지에 입항하자 해군은 찢겨 나간 우현 함교부의 사진을 공개했다. 옆구리를 들이받힌 함정의 모습은 청평 구축함이 들이받았다는 해군 발표를 누구에게나 납득시키는 증거처럼 보였고, 이 사진은 이후 사고를 상징하는 이미지가 되었다. 같은 사진이 해군 발표를 무너뜨리는 첫 단서가 되기까지는 1년 반이 걸렸다.
5. 은폐 [편집]
5.1. 함상에서 [편집]
은폐는 충돌 네 시간 뒤 Valiant의 함교에서 시작되었다. 8월 15일 03시부터 05시 사이, 함장 폴은 부함장 케빈 R. 매슈스 소령에게 23시부터 24시까지의 항해일지를 「정리」하라고 지시했다. 매슈스는 해당 쪽을 뜯어내고 새로 썼다. 원래 일지의 "23:39 우현 전타 20도, 진로 통제 기동(함대 지시)"은 "23:39 청평함 우현 후방에서 고속 접근, 회피 위해 좌현 변침·증속"으로 바뀌었고, "23:41 청평함 선수와 충돌(아군 차단 기동 중)"은 "23:41 청평함, 아군 우현 함교부에 충돌"로 바뀌었다. 재조사단은 폴이 이 지시를 내리기 직전인 02시 40분 윈슬로와 위성전화로 11분간 통화한 기록을 확인했다. 06시 해군 발표는 고쳐 쓴 일지를 근거로 작성되었다.
5.2. 기록의 회수 [편집]
고쳐 쓸 수 없는 기록도 있었다. 전투정보실의 레이더 항적 기록, 그리고 기관 출력과 타각을 초 단위로 남기는 통합 기관·조타 제어 체계의 자동 기록 장치였다. 8월 19일 Valiant가 오보레 해군기지에 입항하자, 해군정보부 제2처장 로버트 K. 에머리 대령이 이끄는 팀이 승함해 전투정보실의 기록 저장장치와 통합 제어 체계의 기록 모듈을 「정보 분석」 명목으로 가져갔다. 두 장치는 사고조사위원회에 넘겨지지 않았고, 위원회에는 "충돌 충격으로 손상되었다"는 통보만 전달되었다.
Ardent의 기록도 같은 날 군사기밀 2급으로 지정되었다. Ardent의 통신 수신 기록에는 23시 12분 윈슬로의 지시가, 항해 레이더에는 Valiant의 기동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같은 날 Valiant 승조원 312명 전원은 「작전 보안 서약서」에 서명했다. 서약서는 사고 경위를 외부에 말하는 것을 군사기밀 누설로 규정하고 있었다. 해군정보부는 이후 열흘에 걸쳐 함교 근무자와 전투정보실 근무자를 면담했다. 면담에 참여한 징집병들은 뒤에 "그것은 조사가 아니라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 알려 주는 자리였다"고 증언했다.
Ardent의 기록도 같은 날 군사기밀 2급으로 지정되었다. Ardent의 통신 수신 기록에는 23시 12분 윈슬로의 지시가, 항해 레이더에는 Valiant의 기동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같은 날 Valiant 승조원 312명 전원은 「작전 보안 서약서」에 서명했다. 서약서는 사고 경위를 외부에 말하는 것을 군사기밀 누설로 규정하고 있었다. 해군정보부는 이후 열흘에 걸쳐 함교 근무자와 전투정보실 근무자를 면담했다. 면담에 참여한 징집병들은 뒤에 "그것은 조사가 아니라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 알려 주는 자리였다"고 증언했다.
5.3. 해군 사고조사위원회 [편집]
해군은 8월 18일 해군 소장 조너선 M. 크레이그를 위원장으로 하는 사고조사위원회를 꾸렸다. 위원회는 고쳐 쓴 항해일지와 함교 장교들의 진술을 근거로 조사를 진행했다. 레이더 항적과 통합 제어 체계 기록은 「손상」으로, Ardent의 기록은 「기밀」로 처리되어 조사 자료에서 빠졌다.
2014년 11월 20일 목요일 발표된 보고서는 "청평 구축함이 Valiant의 진로를 고의로 가로질러 충돌을 유발했다"고 결론 내렸다. 보고서는 구조 지체에 대해서는 "적 함정의 접근 거부 신호로 인한 불가피한 대기"라고 적었다. 12월 폴은 충돌 뒤의 피해 통제를 지휘한 공로로 해군 수훈장을 받았고, 순직한 8명은 한 계급씩 추서되었다.
2014년 11월 20일 목요일 발표된 보고서는 "청평 구축함이 Valiant의 진로를 고의로 가로질러 충돌을 유발했다"고 결론 내렸다. 보고서는 구조 지체에 대해서는 "적 함정의 접근 거부 신호로 인한 불가피한 대기"라고 적었다. 12월 폴은 충돌 뒤의 피해 통제를 지휘한 공로로 해군 수훈장을 받았고, 순직한 8명은 한 계급씩 추서되었다.
5.4. 대통령실 [편집]
해군이 회수하지 못한 기록이 하나 있었다. Valiant의 통합 기관·조타 제어 체계는 제조사의 원격 진단망에 연결되어 있어, 기관 출력과 타각이 자동으로 제조사 서버에 전송되었다. 9월 2일 국방부 조달국의 기술검토관이 손상된 설비의 보증 수리 청구를 처리하다 이 자료를 보았다. 그는 23시 39분 타각이 우현 20도로 기록되어 있어 항해일지의 좌현 변침과 맞지 않는다는 한 쪽짜리 메모를 올렸다.
국방장관 제임스 L. 마스턴은 9월 3일 수요일 이 메모를 국가안보보좌관 월터 K. 헤인즈에게 보고했다. 퇴역 해군 소장인 헤인즈는 메모 하단에 "조사위 결론 존중. 추가 검토 불요."라고 손으로 적었다. 9월 8일 월요일 대통령 주재 안보회의 자료에는 "Valiant 기동 기록 일부 불일치, 해군 조사 중"이라는 한 줄이 들어갔다. 자료에는 대통령 보고 표시가 남아 있다. 콜턴은 2019년 서면 답변에서 "그런 보고를 받은 기억이 없다"고 밝혔다.
9월 초는 콜턴의 지지율이 사고 전보다 14%p 오른 시점이었다. 재조사단은 대통령실이 해군의 은폐를 지시하지는 않았으나, 불일치를 알고도 확인하지 않은 채 해군의 결론을 받아들였다고 판단했다. 보고서는 이를 "지시하지 않은 은폐"라고 불렀다.
국방장관 제임스 L. 마스턴은 9월 3일 수요일 이 메모를 국가안보보좌관 월터 K. 헤인즈에게 보고했다. 퇴역 해군 소장인 헤인즈는 메모 하단에 "조사위 결론 존중. 추가 검토 불요."라고 손으로 적었다. 9월 8일 월요일 대통령 주재 안보회의 자료에는 "Valiant 기동 기록 일부 불일치, 해군 조사 중"이라는 한 줄이 들어갔다. 자료에는 대통령 보고 표시가 남아 있다. 콜턴은 2019년 서면 답변에서 "그런 보고를 받은 기억이 없다"고 밝혔다.
9월 초는 콜턴의 지지율이 사고 전보다 14%p 오른 시점이었다. 재조사단은 대통령실이 해군의 은폐를 지시하지는 않았으나, 불일치를 알고도 확인하지 않은 채 해군의 결론을 받아들였다고 판단했다. 보고서는 이를 "지시하지 않은 은폐"라고 불렀다.
5.5. 청평 승조원 억류와 송환 [편집]
Ardent가 구조한 청평 승조원 9명은 8월 17일 루이나 해군기지로 옮겨졌다. 청평은 8월 15일부터 스위스를 거쳐 즉시 송환을 요구했지만, 루이나는 신원 확인과 치료를 이유로 21일 동안 이들을 붙잡아 두었다. 이 기간에 해군정보부가 이들을 신문했다. 9명은 9월 5일 금요일 스위스 대표단 입회 아래 제3국 항구에서 청평 측에 인도되었다.
귀국한 승조원들은 청평 관영 방송에 나와 Valiant가 여러 차례 진로 앞으로 끼어들었다고 증언했다. 루이나 정부는 이를 "강요된 선전"이라고 일축했고, 루이나 언론도 대부분 같은 태도를 보였다. 2019년 재조사 결과 이들의 증언은 세부까지 사실과 일치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귀국한 승조원들은 청평 관영 방송에 나와 Valiant가 여러 차례 진로 앞으로 끼어들었다고 증언했다. 루이나 정부는 이를 "강요된 선전"이라고 일축했고, 루이나 언론도 대부분 같은 태도를 보였다. 2019년 재조사 결과 이들의 증언은 세부까지 사실과 일치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6. 외교적 공방 [편집]
6.1. 스위스를 거친 서한 [편집]
국교가 없는 두 나라는 이익대표국 스위스를 거쳐 서한을 주고받았다. 청평은 8월 15일 첫 항의 서한에서 사과, 배상, 억류 승조원의 즉시 송환, 국제 조사단 구성을 요구했다. 루이나는 8월 16일 항의 서한에서 청평의 도발을 규탄하고 재발 방지를 요구했다. 두 서한은 모두 상대의 서한에 답하지 않았다.
6.2. 제3국과 국제기구 [편집]
루이나의 동맹국이자 청평과 국경을 맞댄 북산은 공식적으로 루이나의 설명을 지지했지만, 외교 경로로는 양측 모두에 자제를 요청했다. 청평과의 긴장이 해상에서 육상 국경으로 번지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유엔 사무총장은 8월 18일 성명을 내고 양측에 자제와 투명한 조사를 촉구했다. 국제 해운 단체들은 랜드해협 동쪽 항로의 상선 안전에 우려를 나타내며 군함의 국제해상충돌예방규칙 준수를 요구했다.
6.3. 국제 조사단 요구 [편집]
청평은 8월 19일 유엔 사무총장에게 서한을 보내 국제해사 전문가가 참여하는 국제 조사단을 요청했다. 루이나는 8월 21일 "정전 체제에서 양측 사이의 사안은 바젤 정전감시 공동위원회의 소관"이라며 이를 거부했다. 그러나 루이나는 공동위원회 특별회의 소집에도 응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원양에서 일어난 사고는 정전협정의 적용 범위 밖"이라는 이유였다. 국제 조사단은 공동위원회 소관이라 거부하고, 공동위원회는 협정 범위 밖이라 거부한 셈이다. 이 모순은 당시에도 일부 국제법 학자들이 지적했다.
9월 청평은 하이동의 레이더 항적과 VHF 교신 녹음을 공개했다. 루이나는 이를 조작된 자료라고 주장했고, 국제 전문가들은 루이나 측 자료와 대조하지 않고는 검증할 수 없다는 입장을 냈다. 청평은 10월 바젤 공동위원회 정례회의 참석을 중단했고, 2016년 10월에야 복귀했다.
9월 청평은 하이동의 레이더 항적과 VHF 교신 녹음을 공개했다. 루이나는 이를 조작된 자료라고 주장했고, 국제 전문가들은 루이나 측 자료와 대조하지 않고는 검증할 수 없다는 입장을 냈다. 청평은 10월 바젤 공동위원회 정례회의 참석을 중단했고, 2016년 10월에야 복귀했다.
7. 국내 반응 (2014~2015) [편집]
7.1. 안보 결집 [편집]
사고 직후 루이나 여론은 청평 규탄으로 모였다. 콜턴의 지지율은 8월 말 52%까지 올랐다. 8월 22일 벨포르에서 열린 합동 영결식에는 시민 수만 명이 모였고, 의회는 압도적 찬성으로 청평 규탄 결의안을 채택했다. 야당인 사회민주당도 결의안에 찬성했다. 2015년도 해군 예산은 9% 늘었고, 인트레피드급 구축함 2척이 추가 발주되었다.
정부 발표에 의문을 제기한 목소리는 극소수였다. 사회민주당 하원의원 마르그리트 L. 세르는 10월 하원 국방위원회에서 Valiant의 통합 제어 체계 기록 공개를 요구했으나, 해군은 기록이 손상되었다고 답했고 세르는 여당 의원들로부터 "적국의 선전을 반복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정부 발표에 의문을 제기한 목소리는 극소수였다. 사회민주당 하원의원 마르그리트 L. 세르는 10월 하원 국방위원회에서 Valiant의 통합 제어 체계 기록 공개를 요구했으나, 해군은 기록이 손상되었다고 답했고 세르는 여당 의원들로부터 "적국의 선전을 반복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7.2. 유족 [편집]
루이나 순직자 8명의 유족은 2014년 10월 「Valiant 유족회」를 꾸렸다. 유족회는 순직자에 대한 예우와 추모비 건립을 요구했고, 2015년 8월 14일 1주기에 오보레 해군기지 앞에 추모비가 세워졌다. 비문은 "청평의 도발로 바다에서 산화한 여덟 명을 기억하며"였다.
유족 가운데 처음 의문을 품은 사람은 수병 레오 J. 오드랑의 아버지 쥐스탱 M. 오드랑이었다. 아들의 유품으로 돌려받은 편지에는 사고 몇 주 전 "요즘은 다른 나라 배 앞으로 끼어드는 연습을 한다"는 구절이 있었다. 조선소 용접공으로 30년을 일한 그는 해군이 공개한 우현 사진을 보고 이상하다고 느꼈다. 그는 뒤에서 따라붙은 배가 옆구리를 거의 직각으로 찌를 수 있는지 해군에 여러 차례 질의했으나 답을 받지 못했다. 2015년 10월 12일 그는 《코망테르》에 편지를 보냈다.
유족 가운데 처음 의문을 품은 사람은 수병 레오 J. 오드랑의 아버지 쥐스탱 M. 오드랑이었다. 아들의 유품으로 돌려받은 편지에는 사고 몇 주 전 "요즘은 다른 나라 배 앞으로 끼어드는 연습을 한다"는 구절이 있었다. 조선소 용접공으로 30년을 일한 그는 해군이 공개한 우현 사진을 보고 이상하다고 느꼈다. 그는 뒤에서 따라붙은 배가 옆구리를 거의 직각으로 찌를 수 있는지 해군에 여러 차례 질의했으나 답을 받지 못했다. 2015년 10월 12일 그는 《코망테르》에 편지를 보냈다.
8. 탐사 보도 [편집]
《코망테르》의 탐사 보도는 기자 실뱅 R. 르코크가 이끌었다. 보도는 4년 동안 네 단계로 나뉘어 나왔고, 매 단계마다 해군은 반박했다.
8.1. 우현 사진 (2016) [편집]
2016년 3월 10일 《코망테르》는 「옆구리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를 실었다. 오보레 해군 조선창의 한 노동자가 제공한 수리 전 Valiant의 우현 사진 40여 장과, 조선 기술자 3명의 분석이 담겼다. 기술자들은 찢긴 부위의 각도가 70~80도로, 뒤에서 따라붙은 함정이 만들 수 있는 각도가 아니라고 지적했다. 선체의 긁힌 자국이 뒤쪽으로 길게 끌려 있다는 점도 들이받힐 때 Valiant가 빠른 속력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고 분석했다.
기사는 2014년 9월 청평이 공개한 하이동의 뱃머리 사진도 함께 실었다. 찌그러진 정도로 추정한 하이동의 충돌 속력은 8~10노트였다. 고속으로 따라붙어 들이받았다는 해군 발표와 맞지 않는 수치였다.
해군은 충돌 각도가 청평 구축함의 막판 급선회 때문이며, 청평 측 사진은 신뢰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기사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같은 해 루이나 정치는 웨스트로 경기장 폭발 참사의 여파와 코발 게이트로 들끓고 있었다.
기사는 2014년 9월 청평이 공개한 하이동의 뱃머리 사진도 함께 실었다. 찌그러진 정도로 추정한 하이동의 충돌 속력은 8~10노트였다. 고속으로 따라붙어 들이받았다는 해군 발표와 맞지 않는 수치였다.
해군은 충돌 각도가 청평 구축함의 막판 급선회 때문이며, 청평 측 사진은 신뢰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기사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같은 해 루이나 정치는 웨스트로 경기장 폭발 참사의 여파와 코발 게이트로 들끓고 있었다.
8.2. 18해리 밖의 레이더 (2017) [편집]
두 번째 기사는 2017년 4월 6일 나왔다. 사고 당시 18해리 떨어진 곳을 지나던 컨테이너선 「노르드 스타」의 항해기록장치 자료를 해운사로부터 확보한 것이었다. 민간 레이더 기록에는 23시 12분부터 23시 39분까지 Valiant가 하이동의 진로 앞으로 네 차례 가로지르고, 23시 39분 다시 하이동의 뱃머리 앞으로 방향을 트는 항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하이동이 Valiant 쪽으로 방향을 튼 흔적은 없었다.
해군은 민간 레이더의 해상도로는 두 함정의 기동을 구별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기사가 공개한 항적은 2014년 9월 청평이 공개한 하이동의 레이더 항적과 거의 겹쳤다. 루이나 언론이 청평 자료를 진지하게 다시 들여다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해군은 민간 레이더의 해상도로는 두 함정의 기동을 구별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기사가 공개한 항적은 2014년 9월 청평이 공개한 하이동의 레이더 항적과 거의 겹쳤다. 루이나 언론이 청평 자료를 진지하게 다시 들여다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8.3. 312명의 침묵 (2018) [편집]
2018년 1월 18일부터 6회에 걸쳐 연재된 「312명의 침묵」은 전 승조원 14명의 증언을 실었다. 14명 가운데 11명은 전역한 징집병이었다. 가장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은 사고 당시 조타를 맡았던 징집병 클라라 V. 미로(당시 20세)의 증언이었다. 미로는 23시 39분 당직사관으로부터 우현 전타 명령을 받아 복창하고 키를 돌렸다고 말했다. 해군 발표의 「좌현 변침」은 없었다.
해군은 2월 미로를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고발했다. 작전 보안 서약서가 근거였다. 고발은 거센 반발을 불렀다. 징집병 부모 단체와 대학가가 항의 성명을 냈고, 나라의 부름을 받은 징집병이 자기가 겪은 일을 말했다는 이유로 처벌받을 수 있느냐는 물음이 여론을 움직였다. 해군은 4월 고발을 취하했다.
해군은 2월 미로를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고발했다. 작전 보안 서약서가 근거였다. 고발은 거센 반발을 불렀다. 징집병 부모 단체와 대학가가 항의 성명을 냈고, 나라의 부름을 받은 징집병이 자기가 겪은 일을 말했다는 이유로 처벌받을 수 있느냐는 물음이 여론을 움직였다. 해군은 4월 고발을 취하했다.
8.4. 두 개의 항해일지 (2019) [편집]
마지막 결정타는 2019년 2월 14일 기사 「두 개의 항해일지」였다. 사고 당시 함교에서 근무한 항해병 토마 G. 뤼크는 8월 15일 02시 50분, 일지가 고쳐 쓰이기 직전에 원래 쪽을 개인 카메라로 찍어 두었다. 그는 사진을 5년 가까이 보관하다 《코망테르》에 넘겼다. 사진 속 원래 일지에는 "23:39 우현 전타 20도, 진로 통제 기동(함대 지시)"이라고 적혀 있었다.
르코크는 이 기사의 마지막 문단에 이렇게 썼다. "해군은 5년 동안 우리에게 두 권의 일지 가운데 한 권만 보여 주었다. 다른 한 권은 한 병사의 카메라 속에 있었다."
르코크는 이 기사의 마지막 문단에 이렇게 썼다. "해군은 5년 동안 우리에게 두 권의 일지 가운데 한 권만 보여 주었다. 다른 한 권은 한 병사의 카메라 속에 있었다."
9. 재조사와 처벌 [편집]
9.1. 국방부 재조사단 [편집]
2017년 9월 출범한 새 정부는 2018년 7월 2일 국방부 산하에 「RNS Valiant 충돌 사고 재조사단」을 꾸렸다. 단장은 전 해양안전심판원장 엘렌 R. 바티스트였고, 해군 현역은 조사위원에서 제외되었다. 재조사단은 해군정보부가 보관하던 전투정보실 저장장치와 통합 제어 체계 기록 모듈을 찾아냈다. 두 장치는 손상되지 않은 상태였다.
2019년 6월 20일 목요일 발표된 재조사 결과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 23시 12분 제2함대사령관이 진로 통제를 직접 지시했다.
* Valiant는 23시 12분부터 23시 39분까지 하이동의 진로 앞으로 네 차례 끼어들었고, 23시 39분 우현 전타로 다섯 번째 차단 기동을 하다 하이동의 뱃머리에 우현을 들이받혔다.
* 충돌 당시 Valiant는 24노트로 하이동의 앞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하이동은 전속 후진과 좌현 변침으로 피하려 했으나 약 9노트로 Valiant의 우현에 부딪쳤다.
* 8월 15일 함장의 지시로 부함장이 항해일지를 고쳐 썼다.
* 8월 19일 해군정보부가 전투정보실과 기관의 기록 장치를 회수하고 사고조사위원회에 손상되었다고 통보했다.
* 구조가 59분 지체된 주된 원인은 함대사령부의 대기 명령이었다.
* 대통령실은 9월 3일 기록의 불일치를 보고받았으나 확인하지 않았다.
같은 날 국방장관은 루이나 순직자 유족과 Valiant 승조원들에게 공식 사과했다. 청평에는 스위스를 거쳐 "청평 해군 장병 12명의 죽음에 깊은 유감을 표한다"는 서한을 보냈다. 폴의 해군 수훈장은 8월 박탈되었다.
2019년 6월 20일 목요일 발표된 재조사 결과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 23시 12분 제2함대사령관이 진로 통제를 직접 지시했다.
* Valiant는 23시 12분부터 23시 39분까지 하이동의 진로 앞으로 네 차례 끼어들었고, 23시 39분 우현 전타로 다섯 번째 차단 기동을 하다 하이동의 뱃머리에 우현을 들이받혔다.
* 충돌 당시 Valiant는 24노트로 하이동의 앞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하이동은 전속 후진과 좌현 변침으로 피하려 했으나 약 9노트로 Valiant의 우현에 부딪쳤다.
* 8월 15일 함장의 지시로 부함장이 항해일지를 고쳐 썼다.
* 8월 19일 해군정보부가 전투정보실과 기관의 기록 장치를 회수하고 사고조사위원회에 손상되었다고 통보했다.
* 구조가 59분 지체된 주된 원인은 함대사령부의 대기 명령이었다.
* 대통령실은 9월 3일 기록의 불일치를 보고받았으나 확인하지 않았다.
같은 날 국방장관은 루이나 순직자 유족과 Valiant 승조원들에게 공식 사과했다. 청평에는 스위스를 거쳐 "청평 해군 장병 12명의 죽음에 깊은 유감을 표한다"는 서한을 보냈다. 폴의 해군 수훈장은 8월 박탈되었다.
9.2. 재판 [편집]
검찰과 군 검찰은 2019년 9월 26일 5명을 기소했다. 전역한 윈슬로와 에머리는 민간 법원에서, 현역이던 폴과 매슈스, 사고조사위원회 간사 리사 H. 볼트 대령은 군사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피고인 | 당시 직위 | 확정 |
해럴드 P. 윈슬로 | 제2함대사령관 | 징역 3년 |
데릭 A. 폴 | Valiant 함장 | 징역 2년 6개월 |
케빈 R. 매슈스 | Valiant 부함장 |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 |
로버트 K. 에머리 | 해군정보부 제2처장 | 징역 1년 6개월 |
리사 H. 볼트 | 사고조사위원회 간사 | 무죄 |
윈슬로와 폴에게는 업무상과실치사와 허위공문서작성교사, 매슈스에게는 허위공문서작성, 에머리에게는 증거인멸, 볼트에게는 허위공문서작성 혐의가 적용되었다. 판결은 2021년에 모두 확정되었다. 매슈스는 재판 초기부터 혐의를 인정하고 윈슬로와의 통화 내용을 진술해 감형되었다. 볼트는 통합 제어 체계의 원격 진단 자료가 있다는 사실은 알았으나 내용을 보지 못했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져 무죄가 선고되었다.
업무상과실치사의 피해자에는 루이나 순직자 8명과 함께 청평 해군 12명이 포함되었다. 루이나 법원이 청평 군인의 죽음을 루이나 군인의 범죄 결과로 인정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9.3. 대통령실의 책임 [편집]
검찰은 7월 헤인즈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으나, 직무유기의 공소시효 5년이 2019년 9월 3일 만료되기 전까지 기소 여부를 결정하지 못했다. 헤인즈는 공소권 없음으로 불기소되었다. 콜턴은 서면 조사에만 응했고 입건되지 않았다. 대통령실의 책임을 사법적으로 물을 수 없게 되자, 은폐는 해군이 했고 대통령실은 몰랐을 뿐이라는 해석과 알고도 묻었다는 해석이 지금까지 맞서고 있다.
10. 사상자 [편집]
10.1. 루이나 [편집]
이름 | 계급 | 나이 |
레오 J. 오드랑 | 수병(징집) | 20세 |
마리 K. 탕기 | 수병(징집) | 21세 |
안톤 S. 베레조프 | 수병(징집) | 20세 |
위고 P. 라크루아 | 상등수병(징집) | 22세 |
에바 L. 모랭 | 수병(징집) | 19세 |
니콜라 R. 벨맹 | 수병(징집) | 21세 |
파스칼 T. 기요 | 중사 | 34세 |
올가 D. 셰프첸코 | 하사 | 27세 |
계급은 사고 당시 기준이며, 모두 한 계급씩 추서되었다. 7명은 제2 승조원 거주구역에서, 통신 부사관 올가 D. 셰프첸코 하사는 통신실에서 숨졌다. 부상자 21명 가운데 6명이 중상이었다.
10.2. 청평 [편집]
청평 측 사망자 12명은 앞쪽 승조원 거주구역에 있던 9명과 바다에 떨어진 뒤 숨진 3명이다. 부상자는 17명이었다. 청평 관영 매체는 2014년 8월 20일 사망자 12명의 명단을 공개했으나, 루이나 언론에 이 명단이 처음 실린 것은 재조사 결과가 나온 2019년 6월이었다.
11. 영향 [편집]
11.1. 청평과의 관계 [편집]
청평은 2019년 루이나의 유감 서한에 대해 "사과와 배상이 없는 유감은 의미가 없다"고 답했다. 배상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두 나라는 지금도 국교가 없다. 2020년 이후 바젤 공동위원회에서 원양 우발 충돌을 막기 위한 절차가 논의되었으나 아직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하이동은 2015년 여름 수리를 마쳤고, 2016년 5월 다시 원양 항해에 나서 랜드해협을 통과했다. 이때 루이나 해군은 5해리 밖에서 감시만 했다.
하이동은 2015년 여름 수리를 마쳤고, 2016년 5월 다시 원양 항해에 나서 랜드해협을 통과했다. 이때 루이나 해군은 5해리 밖에서 감시만 했다.
11.2. 해군에 대한 문민 통제 [편집]
「적성국 수상함 근접 감시 지침」은 2019년 폐지되었다. 이를 대신한 「해상 조우 규칙」은 차단 기동을 명시적으로 금지하고, 적성국 함정과 2해리 안에서 기동할 때는 국방장관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해군의 내부 지침을 모두 국방부에 등록하게 하는 규정도 이때 생겼다. 해군이 군 안팎에서 가진 큰 발언권이 이 사고의 배경이었다는 비판이 쏟아졌고, 해군 출신 인사가 국가안보 요직을 차지하는 관행도 도마에 올랐다.
11.3. 징집병의 진술권 [편집]
2020년 군사기밀보호법이 개정되어, 군 사고의 조사·재판·언론 보도와 관련해 자신이 직접 겪은 사실을 진술하는 행위는 기밀 누설로 보지 않도록 했다. 개정 조항은 흔히 「미로 조항」으로 불린다. 작전 보안 서약서의 효력도 작전이 끝난 뒤 5년으로 제한되었다. 루이나처럼 남녀 모두를 징집하는 나라에서, 징집병은 명령을 거부할 수 없는 동시에 명령의 결과를 말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는 점이 개정의 논거가 되었다.
11.4. 유족 사회의 분열 [편집]
재조사 결과는 유족회를 갈라놓았다. 8가족 가운데 5가족은 결과를 받아들이고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으나, 3가족은 재조사가 "아이들의 죽음에서 의미를 빼앗는다"며 반발했다. 2020년 추모비의 비문을 "2014년 8월 14일 랜드해협에서 순직한 여덟 명을 기억하며"로 바꿀 때도 3가족은 반대했다. 쥐스탱 오드랑은 비문을 바꾸는 날 기자들에게 "아들은 누구의 도발로 죽은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명령으로 죽었다"고 말했다.
12. 논점 [편집]
12.1. 왜 차단 기동이었나 [편집]
하이동은 공해를 항행하고 있었고, 훈련 구역 안으로 들어오지도 않았다. 루이나 해군이 그 진로를 막아야 할 군사적 이유는 뚜렷하지 않았다. 재조사단은 보고서에서 "해군은 청평 함정의 통과를 막으려 한 것이 아니라, 통과를 허락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남기려 했다"고 적었다. 정전 이후 처음 랜드해협을 지나려는 청평 군함 앞에서, 차단 기동은 군사 행동이라기보다 상징적 행위였다는 해석이다.
12.2. 규칙이 없는 바다 [편집]
정전협정은 원양에서의 조우를 다루지 않았고, 두 나라에는 직통 연락 수단도 없었다. 국교가 없으니 해상사고 방지 합의를 맺을 통로도 없었다. 재조사단은 "규칙이 없는 곳에서 해군은 자기 규칙을 만들었고, 그 규칙은 해군 안에서만 보였다"고 평가했다. 구조가 59분 지체된 것도 같은 공백에서 비롯되었다. 두 함정은 서로를 구할 절차가 없었고, 서로를 믿을 근거도 없었다.
12.3. 은폐는 누구를 위한 것이었나 [편집]
해군의 은폐는 지휘부의 책임을 덮는 동시에, 진로 통제라는 관행 자체를 지키려는 것이었다는 평가가 많다. 대통령실의 묵인에 대해서는 사고 뒤 오른 지지율과 해군 예산 증액이 걸려 있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콜턴 정부 시기 대통령실이 정보기관과 군의 불법 행위를 알고도 덮거나 이용했다는 의혹은 이 사고 말고도 17-3호 작전과 코발 게이트에서 되풀이되었다.
13. 연표 [편집]
* 1977년 7월 27일 — 청북전쟁 정전협정 체결
* 2011년 — 청평 하이동급 구축함 1번함 하이동 취역
* 2012년 — 루이나 해군, 「적성국 수상함 근접 감시 지침」 개정
* 2014년 7월 — 청평, 하이동의 랜드해협 통과 계획 발표
* 2014년 8월 12일 — 루이나 해군, 하이동 포착·근접 감시 시작
* 2014년 8월 14일 23시 12분 — 제2함대사령관, 진로 통제 지시
* 2014년 8월 14일 23시 41분 — 충돌
* 2014년 8월 15일 — 항해일지 수정, 루이나 해군·청평 국방부 발표
* 2014년 8월 16일 — 콜턴 대통령 TV 연설
* 2014년 8월 19일 — 해군정보부, 기록 장치 회수
* 2014년 8월 21일 — 루이나, 국제 조사단 요구 거부
* 2014년 9월 3일 — 국가안보보좌관에게 기동 기록 불일치 보고
* 2014년 9월 5일 — 청평 승조원 9명 송환
* 2014년 11월 20일 — 해군 사고조사위원회, 청평 책임 결론
* 2015년 8월 14일 — 오보레 해군기지 앞 추모비 건립
* 2015년 10월 12일 — 쥐스탱 오드랑, 《코망테르》에 편지
* 2016년 3월 10일 — 《코망테르》, 우현 사진 보도
* 2017년 4월 6일 — 《코망테르》, 민간 레이더 기록 보도
* 2018년 1월 18일 — 《코망테르》 연재 「312명의 침묵」 시작
* 2018년 2월 — 해군, 클라라 미로 고발 (4월 취하)
* 2018년 7월 2일 — 국방부 재조사단 구성
* 2019년 2월 14일 — 《코망테르》, 고쳐 쓰기 전 항해일지 사진 보도
* 2019년 6월 20일 — 재조사 결과 발표, 청평에 유감 서한
* 2019년 9월 26일 — 5명 기소
* 2020년 — 군사기밀보호법 개정, 추모비 비문 변경
* 2021년 — 판결 확정
* 2011년 — 청평 하이동급 구축함 1번함 하이동 취역
* 2012년 — 루이나 해군, 「적성국 수상함 근접 감시 지침」 개정
* 2014년 7월 — 청평, 하이동의 랜드해협 통과 계획 발표
* 2014년 8월 12일 — 루이나 해군, 하이동 포착·근접 감시 시작
* 2014년 8월 14일 23시 12분 — 제2함대사령관, 진로 통제 지시
* 2014년 8월 14일 23시 41분 — 충돌
* 2014년 8월 15일 — 항해일지 수정, 루이나 해군·청평 국방부 발표
* 2014년 8월 16일 — 콜턴 대통령 TV 연설
* 2014년 8월 19일 — 해군정보부, 기록 장치 회수
* 2014년 8월 21일 — 루이나, 국제 조사단 요구 거부
* 2014년 9월 3일 — 국가안보보좌관에게 기동 기록 불일치 보고
* 2014년 9월 5일 — 청평 승조원 9명 송환
* 2014년 11월 20일 — 해군 사고조사위원회, 청평 책임 결론
* 2015년 8월 14일 — 오보레 해군기지 앞 추모비 건립
* 2015년 10월 12일 — 쥐스탱 오드랑, 《코망테르》에 편지
* 2016년 3월 10일 — 《코망테르》, 우현 사진 보도
* 2017년 4월 6일 — 《코망테르》, 민간 레이더 기록 보도
* 2018년 1월 18일 — 《코망테르》 연재 「312명의 침묵」 시작
* 2018년 2월 — 해군, 클라라 미로 고발 (4월 취하)
* 2018년 7월 2일 — 국방부 재조사단 구성
* 2019년 2월 14일 — 《코망테르》, 고쳐 쓰기 전 항해일지 사진 보도
* 2019년 6월 20일 — 재조사 결과 발표, 청평에 유감 서한
* 2019년 9월 26일 — 5명 기소
* 2020년 — 군사기밀보호법 개정, 추모비 비문 변경
* 2021년 — 판결 확정
14. 여담 [편집]
* 하이동이 23시 30분 무렵 보낸 VHF 경고 "귀함은 위험한 항해를 하고 있다"는 청평 해군이 원양 항해를 앞두고 새로 만든 영어 교신 교범의 문장을 그대로 쓴 것이었다. 교범의 해당 쪽 제목은 「우호적이지 않은 함정과의 조우」였다.
* 미로는 전역 뒤 해양대학에 진학해 상선 항해사가 되었다. 그는 2021년 인터뷰에서 "지금은 내가 명령을 내리는 자리에 있다. 다섯 번째 기동 같은 명령은 내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 뤼크가 항해일지를 찍은 카메라는 그가 입대 전 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필름 카메라였다. 해군정보부의 휴대전화 점검에 걸리지 않은 이유였다.
* 2020년 이후 루이나 해군 신임 장교 교육 과정에는 이 사고가 사례 연구로 들어가 있다. 교재의 제목은 「다섯 번째 기동」이다.
* 미로는 전역 뒤 해양대학에 진학해 상선 항해사가 되었다. 그는 2021년 인터뷰에서 "지금은 내가 명령을 내리는 자리에 있다. 다섯 번째 기동 같은 명령은 내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 뤼크가 항해일지를 찍은 카메라는 그가 입대 전 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필름 카메라였다. 해군정보부의 휴대전화 점검에 걸리지 않은 이유였다.
* 2020년 이후 루이나 해군 신임 장교 교육 과정에는 이 사고가 사례 연구로 들어가 있다. 교재의 제목은 「다섯 번째 기동」이다.
